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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고려의 서희에 대해서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5.22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고려의 서희에 대해 상세히 정리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희가 태어난 곳

2. 서희가 태어난 때

3. 서희의 업적
1) 절도 있고 강직한 문관
2) 거란의 80만 대군을 혼자서 물리친 외교가
3) 여진을 물리치고 압록강까지 확보한 전략가

4. 서희에 대한 후세의 평가
1) 고려의 종묘에 모신 서희의 위패
2)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서희
3) 조선시대 기타 사서에 나타난 서희

본문내용

1) 절도 있고 강직한 문관
서희의 어렸을 때 자(小字)는 염윤(廉允)이고 내의령 서필의 아들이다. 성격이 위엄이 있고 바르며, 삼가고 상대방을 공경하였다
광종23년(972년) 사명을 받들어 송나라에 갔다. 그 때 십 수년 동안 송나라에 조공하지 않았으나 도착한 서희의 몸가짐에 절도가 있는 것을 본 송나라 태조가 갸륵하게 여겨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벼슬을 내렸다.
서희가 초년에 벼슬한 것은 광종 때인데, 광종(949∼975)은 고려 역대 제왕 가운데서 가장 자주적인 정신을 가지고 왕권확립을 위하여 가장 활기차게 노력했던 영걸이었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광덕(光德)]과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쓰고 서울인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하였으며(광종 11년), 한 때 [황제]라는 칭호를 쓴 것 등은 모두 그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왕권강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해에 후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선다.
고려는 송나라가 들어선 다음다음 해(962)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보낸 뒤 외교관계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송나라가 971년 남한(南漢)을 멸망시키고, 남당(南唐)을 굴복시키는 등 남조를 거의 평정하였고, 북쪽의 요나라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972년 당시 내의사 시랑으로 있던 서희를 비롯한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서희 열전에도 나와 있듯이 10년 남짓 통교가 없던 때라(時不朝宋十數年) 송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았고 처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서희의 태도가 몸가짐에 절도가 있는 것(容儀中度)을 본 황제가 벼슬까지 내린 것을 보면 상당히 성공적인 외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희의 아버지인 서필이 바른말을 잘하는 강직한 선비였다는 것은 앞에서 보았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서희도 그러한 면을 유감없이 발휘한 3가지 사실이 열전에 실려 있다.

① 왕이 몰래 절에 가서 놀아서는 안 된다
성종 2년(983년) 좌승(佐丞)을 거쳐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었다. 왕을 따라 서경(지금 평양)에 갔을 때, 성종이 몰래 영명사에 가서 놀고자 하자 서희가 왕에게 글을 올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간하니 마침내 중지하고 도리어 안장과 말을 상으로 내리시고 뒤에 내사시랑(內史侍郞)으로 승진시켰다.

② 임금이 신하의 막사에 들어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서희가 일찍이 임금을 호위하고 해주에 갔을 때 성종이 서희 막사로 와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니, 서희는 "신의 막사는 임금께서 오실 만한 곳이 못됩니다"라고 했으며, 술을 올리라고 명령하니 "신의 술은 드릴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니, 성종은 마침내 막사 밖에 앉아서 어주(御酒)를 올리도록 하여 함께 마시고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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