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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백제-고구려 부흥운동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5.19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8페이지 | 가격 900원

소개글

발표수업을 위해 쓴 레폿입니다. 교수님이 까다로운 수업이라서 건성건성 할 수 없었죠.. 엄청 신경써서 쓴 레폿입니다. 그랬던 만큼.. 당연 결과는 좋았죠.. 많은 자료를 참고해서 정리한 만큼.. 교수님께 정리가 깔끔하고 잘되어 있다고 칭찬도 들었습니다. ^^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견훤의 후백제 건국
2.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1) 초창기(892 - 900)
2) 태동기 (900 - 918)
3) 정비기(918 - 925)
4) 시련기(925.10 - 927.8)
5) 전성기(927.9 - 929.11)
6) 쇠퇴기(929.12 - 936.9)
3.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1) 세력기반 확립기(894.10 - 895.8)
2) 건국기 (895.8 - 901)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 중앙에서는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분쟁이 전개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라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약화되었고, 정부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점차 경주 일원으로 축소되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낙향한 귀족이나 지방의 토착세력들이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호족들이 지방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자 신라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각지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미치는 지역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라 칭하며, 여러 권한을 행사하고 가혹한 수탈을 일삼아 농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참혹하였다.
호족들의 압박과 수탈에 시달린 사람들은 유민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 다니다가, 귀족들의 장원에서 생활하며 사병이나 노예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결국 국가재정의 궁핍을 가져와서 농민의 조세납부 토대 위에서 운영되던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이 상황에서 정부는 기근과 흉년, 질병에 시달린 농민을 구휼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농민에게 가혹한 조세징수를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귀족의 사치와 향락생활, 현실 인식의 안이함이 농민을 더욱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眞聖女王의 실정이 거듭되면서 누적된 모순은 전국적인 농민의 반란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이 내란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곳곳에서 반란세력들이 농민의 불만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났다. 甄萱과 弓裔도 이러한 정세에 편승하여 멸망한 지 2백년이 넘는 百濟와 高句麗의 재건을 내세우면서 각각 後百濟와 後高句麗를 건국하였다. 이리하여서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의 세 나라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후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아래에서는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 견훤의 전략 및 영역의 변천을 시기별로 나눠서 알아본 후,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에 대하여 적어보겠다.


Ⅱ. 본론

1. 견훤의 후백제 건국
견훤은 상주 호족 阿慈介의 長子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농민층 혹은 촌주 출신이었다. 부친인 아자개는 호족으로 성장한 후 자신의 장남인 견훤을 입경시켜 중앙정부와 연결을 꾀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중앙군에 참여한 후 경주를 떠나 서남해의 방수군으로 파견되었다.

참고 자료

* ‘후백제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군사> 41호
*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 전남지역 호족세력의 추이’ <경주사학> 22편
* ‘후백제 견훤의 역사계승인식’ <사학연구> 58-59호
* ‘궁예의 세력형성과 건국’ <진단학보> 75권
*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이도학.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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