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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안중근, 그의 심판은 정당한가?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5.1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안중근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본 글입니다.

목차

1.시작하는 글
2.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3.이토 히로부미는 누구인가?
4.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을까?
5.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으로써 우리에게 돌아오는 부정적인 영향들
6. 안중근은 테러범, 하지만 구분되어야 한다(911테러비교)
7.결론
질문

본문내용

1.시작하는 글
암울했던 일제 식민통치 시대에 우리의 민족적 기운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도록 힘을 불어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말을 남겼던, 그리고 조국을 대신하여 이토를 심판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도마 안중근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조국의 독립, 그리고 ‘동양평화’라는 거대한 목적을 가지고 이국으로 건거나 무장 독립투쟁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을 대신하여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심판하였다. 우리는 당연시 도마 안중근의 업적과 희생을 높이 평가해 오고 있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각도에서 도마 안중근을 바라보고자 한다. 과연 그가 할 일은 그 당시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만 미쳤을까?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불어닥친 부적정인 영향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를 재조명 하고자 한다.

2.안중근 그는 누구인가?
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 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 보상 기성회 관서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신협약의 체결, 군대 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군사령관 직책을 맡아 엄인섭과 함께 의병군을 이끌고 경흥까지 쳐들어갔으나 일본에 대패하여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로 가서 국민회, 일심회, 단지회 등을 조직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크에서는 동의회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나는 의병의 참모 중장으로 독립 전쟁을 했고 참모 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 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 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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