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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혼인제도 변천과 여성

저작시기 2005.11 |등록일 2006.05.12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3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혼인으로 살펴본 여성의 지위변화 및 혼인제도, 이혼제도, 상속제도, 호적제도 그리고 호주제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본 글입니다^^
또 조선시대의 혼수문제는 어떠했을까? 삼종칠거는 언제부터 구체화된 것일까? 조선 전기 재산의 자녀 균분 상속은 어디에 나타나 있나? 같은 간단한 질문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진 글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 본문
1.혼인제도
2.이혼제도
3.상속제도
4.호적제도
- 호주제의 문제점
Ⅲ.결론

<중간중간에 간단한 물음들 有>
※조선시대의 혼수문제는 어떠했을까?
※ 삼종칠거는 언제부터 구체화된 것일까?
※ 조선 전기 재산의 자녀 균분 상속은 어디에 나타나 있나?

본문내용

Ⅰ.서론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3세대 이상이 한 집에 사는 대가족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현대에는 핵가족이 일반적이며 미혼동거를 하거나 혼자 사는 등의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개인주의와 평등주의가 우선된 가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그동안의 결혼가족제도에 대한 변화를 요구한다. 이에 이 리포트에서는 우리가 흔히 “전통”이라 인식하는 조선시대의 제도와 오늘날의 제도를 점검해보고 그것들을 비교하고 또한 변화양상을 고찰하여 미래 우리나라의 결혼가족제도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사회의 중심이념이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가문의 유지와 발전”이 상당히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 어느 가문에 속해 있느냐가 한 개인을 이해하고 또 나타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가문의 유지는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이어졌다. 자신보다 선대의 고인에 대한 제사를 모심으로써 가문을 이어간 것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던 성리학에 의해, 이러한 제사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만이 주재할 수 있었으므로 남자만이 가문을 이어갈 수 있었다. 즉, 조선시대 결혼가족제도의 중심은 “제사상속”이었으며, 제사를 주재할 수 있는 “남자”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조선시대의 혼수문제는 어떠했을까?
예물 및 혼수문화는 그 유래를 찾아본다면 납폐와 예장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혼인에서 함 (봉채 ,납채, 납폐, 봉장, 예단, 예장, 함, 큰 짐 등으로 불리었다)을 드리는 것은 매우 오래된 우리의 풍습인데, 남녀가 혼인할 것을 물증으로 약속하는 풍습인 것이다. 고대 삼국시대부터 유래하였다고 하며 그 당시에는 아주 간략하게 치루어졌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녀와의 혼인에서는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가지고 왔다는 얘기도 있으며 일반인은 남녀가 혼인할 것을 약속한 후 남자가 여자집에 술과 고기를 갖고 가서 술 한잔을 나누는 것이 잔치였다고 한다.
그런데 15세기 이후, 주자가례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주자 육례 중 납폐가 중요한 혼인순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부자들 사이에서는 비싼 물건을 많이 넣어 보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고 장차 서민들 사이에선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되어 나라에서 그 품목과 수량을 제한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지나친 사치를 감독하게까지 하였다.
또한 함은 혼인 당일에 앞세우고 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부자들이 관리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함을 미리 보내기도 하였으니 이 풍습이 오늘까지 이어져서 요즘에는 함을 미리 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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