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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컴과 문화]발터 벤야민 다시 읽기

저작시기 2006.04 |등록일 2006.05.0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6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정보화시대’라고 말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산업적인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 뿐 만 아니라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정보화시대의 물결은 깊게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발표에서는 문화적 환경에 내제하고 있는 정보화시대와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독일의 문필가, 미학자
발터 벤야민 다시 읽기
1. 전자복제시대의 미디어 환경과 발터 벤야민
2. 시각예술의 지형도
3. 이미지의 가상성과 현실성
4. 변증법적 이미지
5. 글을 맺으며

* 논쟁거리

본문내용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독일의 문필가, 미학자
1892. 7. 15 독일 베를린 ~ 1940. 9. 26 프랑스 포르부 근처
-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가장 중요한 독일의 문학비평가로 꼽힌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브라이스가우에 있는 프라이부르크・뮌헨・베른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20년 베를린에 정착해 문학비평가이자 번역가로 일했다. 학문적 성공에 별 뜻이 없으면서도 공부를 계속하던 중, 뛰어나긴 하지만 관습에 위배되는 박사학위 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1982)이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거절당하자 공부를 중단했다.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독일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도 계속 문학잡지에 수필과 평론을 썼으나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탈출하려고 남쪽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대에 있는 포르부라는 작은 마을의 경찰서장으로부터 자기가 게슈타포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살하고 말았다.
야심의 크기로만 따진다면 발터 벤야민의 야심은 아돌프 히틀러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유태계 독일인이었던 그는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텍스트 안에서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변증법과 유태신학의 신비주의적 종말론이 그것이다. 히틀러는 유태민족을 제거함으로써 유럽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발터 벤야민은 유태민족과 더불어 유럽을 ‘구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벤야민 생전에 이 둘의 조합은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벤야민은 평생을 통해 끊임없이 실패를 거듭한 사람이었다. 그가 기획했던 잡지들은 모두 기획단계에서 중단됐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세 번의 사랑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는 교수 자격 취득 시험에 떨어졌고, 평생 동안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가장 친했던 브레히트와 게르하르트 숄렘마저도 벤야민을 끝내 외면했다. 그가 13년 동안 목숨을 걸고 작업했던 <파사젠베르크> 논문은 그의 후배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의해 퇴짜를 맞았고, 미국 비자를 받아 망명하는 데에도 실패한 그는 스페인 국경을 넘다 자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평생에 걸쳐 수행하려고 했던 사명, 즉 <파사젠베르크> 완성을 통한 역사적 유물론과 메시아 구원론의 결합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벤야민은 세속적 욕망에 초연할 수 있는 초인이 아니었다. 그가 진지하게 시도했던 현실과의 타협이 실패할 때마다 그는 깊이 절망했다. 그는 급진적 지식인이었음에도 정치에 투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참고 자료

현대사회와 대중문화 강현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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