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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국의 민주사상]송시열 왜 실록에 3000번 올랐나?

저작시기 2005.10 |등록일 2006.05.0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페이지 | 가격 300원

소개글

역사스페셜 보고 쓴 감상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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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가까이 오른 조선시대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실로 극단적이다. 그의 학문이 드높아 유학자에게 최고의 스승이 되었고 오직 곧게만 살았다 하여, 그에게 극단적인 찬사를 보내기도 하는 반면,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사로운 이익만 쫒았고, 역적이 아닌 경우엔 사형을 당하지 않았었으나, 대신이면서도 사약을 받을 정도의 인물로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입장이 동시에 존재한다.
어찌됐든 실록에 3000번이나 올랐다는 점은 그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조선왕조에 매우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송시열은 직접 벼슬에 오른 적은 별로 없었으나, 기호학파의 정통을 이었으므로 서인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정계를 장악함으로서 정계에 진출하지 않아도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스승인 송시열에 대해 극단적인 찬사를 보내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이처럼 그의 영향력이 막강했기에, 그로인해 정계에서 밀려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자들에게는 비난의 화살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시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예송논쟁과 북벌론이지 싶다. 그의 정치적 목표는 주자학적 정치 이념이 구현된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군신간의 상하질서가 엄격히 유지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송논쟁을 통해, 군신간의 상하질서를 유지라는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가족의 개념을 왕실에다 도입하는 논리를 펼친다. 이는 주자학적 정치 이념의 구현이라는 목적보다는 효종이 죽자, 자신의 정치적 지위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자파 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벌론을 통해 한족을 대신하여 청에게 복수하려고 하였다. 효종은 인조시절에 2차례의 호란과 그당시 아버지가 당한 굴욕과, 자신이 8년간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는데에 분노하여 북벌을 주장한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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