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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의 북진정책은 성공인가?실패인가?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5.06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5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약간 논문식으로 고려의 북진 정책이 어떻게 행해졌는지 외침을 통해 알아보고
정리한 글입니다.

목차

1. 제목

2. 문제 제기

3. 연구방법

4.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
(1) 북진 정책(北進政策)
(2) 결과

5. 고려의 북진정책과 거란의 남진정책의 충돌
(1) 1차 여요전쟁 -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을 막다
(2) 2차 여요전쟁 -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다시 침략한 거란
(3) 3차 여요전쟁 -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을 물리치다
(4) 결과

6. 고려와 여진
(1) 은위병용
(2) 금의 건국과 관계의 변화
(3) 결과

7. 고려와 몽고
(1) 1차 침입
(2) 2차 침입
(3) 3차 침입
(4) 4차 침입
(5) 5차 침입
(6) 6차 침입
(7) 결과

8. 공민왕의 국권회복과 영토 확장
(1)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혁파
(2) 동녕부(東寧府) 정벌

9. 고려의 북진정책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10. 참고문헌

본문내용

4. 태조 왕건의 북진 정책
(1) 북진 정책(北進政策)
고려 태조 왕건이 이룩한 역사적 업적은 후삼국의 통일과 북진정책의 추진이었다. 그의 북진정책은 옛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수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건은 분열된 후삼국의 통일이라는 현실로 인해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수복하겠다는 원대한 목표까지는 달성하지 못했다.
고려가 건국되면서 평안도 or일대에는 여진족들이 부락단위로 산거(散居)하게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북쪽지역은 미확정 국경지대로 변모해 있었다. 태조 왕건이 즉위하면서 평양을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게 된 명분도 바로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 지역의 황폐화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황해도 북쪽과 평안도 일대가 황폐하여 여진족이 출몰함으로써 변방지역의 피해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의 울타리를 튼튼히 하여 후세의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해 그곳으로 백성을 이주시켜야 한단,s 것이 태조 왕건의 판단이었다. 왕건은 이주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방 지역에 즉 대동강 이북과 청천강 이남지역에 다음과 같이 성책(城柵)을 축조하였다.
왕건의 성책 축조는 고구려 구토의 수복과 북번인(주로 거란을 뜻함)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실시되었다. 왕건의 거란에 대한 인식은 적대적이었다. 그것은 동족의식을 갖고 있던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화친을 맺을 수 없다는 적대감은 거란 사신 38명을 섬에 유배시키고 그들이 선물로 갖고 온 낙타를 굶어 죽게 할 만치 강렬했다. 이후 왕건은 후당과 후진의 힘을 이용하여 거란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거란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태조 왕건의 북방정책은 서북면에 집중되었다. 청천강변의 요새지인 안북(안주)에 부(府)를 설치하고,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에 패서 13진을 설치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청천강까지 확장되었다.

참고 자료

안주섭 『고려 거란 전쟁』 경인문화사 2003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
이윤섭 『역동적 고려사』 필맥 2004
장학근 『고려의 북진정책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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