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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오스만제국시대의 동부지중해

저작시기 2004.05 |등록일 2006.05.01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9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1.오스만 제국시대의 동부 지중해

1-1.동부 지중해 장악을 위한 오스만-베네치아 격돌
1-2.오스만 제국의 동부 지중해 제해권 장악
1-3.슐레이만시기의 해상지위-해군제독 바르바로사등장
4-4. 오스만 해군력의 쇠퇴


유럽의 신대륙발견과 식민지활동의 시작
제국의 해양에서의 부흥기점 - 콘스탄티노플점령
제국의 해양에서의 몰락기점 - 이탈리해전의 패배
- 그리스해전의 패배

목차

1.오스만 제국시대의 동부 지중해

1-1.동부 지중해 장악을 위한 오스만-베네치아 격돌
1-2.오스만 제국의 동부 지중해 제해권 장악
1-3.슐레이만시기의 해상지위-해군제독 바르바로사등장
4-4. 오스만 해군력의 쇠퇴


유럽의 신대륙발견과 식민지활동의 시작
제국의 해양에서의 부흥기점 - 콘스탄티노플점령
제국의 해양에서의 몰락기점 - 이탈리해전의 패배
- 그리스해전의 패배

본문내용

오스만 제국 시대의 동부 지중해

오랜 유목적 전통에 젖어있던 오스만 제국의 형성기에 군주들은 아직 바다의 중요성과 해상권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향이 있었다. 물론 제국의 초반부터 부분적인 조선소가 건설되고, 1390년 이을드름 베야지트 술탄 시대에 차나칼레(다다넬스) 해협의 겔리볼루에 조선소와 해군기지가 건설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당시 에게해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나 제노아 왕국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략 이전까지 많은 해전에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동서교역과 육해상 실크로드라는 전략적 요충지대를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서구의 해상세력이 희망봉을 돌아 독자적인 동방무역루트를 확보한 뒤에도 서방 무역상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교역대상국이었다. 무엇보다 16세기까지도 동아시아의 물품이 오스만 제국 영토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육상교역로가 갖는 물량과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부 지중해 산물의 거래로 인한 유럽상인들의 이익이 여전히 매력적인 수준이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베네치아나 제노아 같은 무역 해상왕국들은 오스만 제국이 성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비잔틴과 셀주크 국가들과 무역협정을 맺고 아나톨리아는 물론 흑해에서도 교역을 계속해왔다. 심지어 아나톨리아와 이스탄불의 갈라타 지구에 식민지를 두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성립과 함께, 최초로 1352년 제노아에게, 이어 베네치아에게 오스만 영토에서의 교역권을 인정해 주었다. 정복자 파티 술탄 메흐메드 2세는 1479년 베네치아와 맺은 협정에서 트라브존과 케페에서의 무역권을 인정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상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세력은 그곳을 거점으로 동부 지중해 무역에 종사하던 제노아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오스만의 비잔틴 공략시 중립을 선언하고 실제로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여러 가지로 협력하였지만, 결국 흑해에 대한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함으로써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크림 반도와 트라브존의 해상거점에 설치한 합자회사와 기반시설들이 모두 봉새되었다. 그 자리를 오스만 해군이 장악하였다. 그 후 제노아 상권은 동부 지중해를 포기하고 스페인으로 옮겨가면서 콜럼버스라는 제노아 선원을 스페인에 바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로써 1774년 퀴축 카이나르자 조약이 성립될 때까지 흑해에는 외국인 선박들의 출입이 불허되었다. 그렇지만 재빨리 오스만 궁정과 협력하여 공생의 길을 찾앚던 베네치아의 상황은 달랐다.

동부 지중해 장악을 위한 오스만-베네치아 격돌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오스만에 대한 유럽 십자군 결성이 본격화되었다. 이 때, 오스만은 지중해의 해상 왕국인 베네치아와 연대하여 유럽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동방 무역으로 번성한 베네치아는 교역로의 새로운 주인인 오스만과 우호적인 관계를 희망하였고, 오스만으로서도 해상왕국인 베네치아 공략에 필요한 해군력의 약화를 인식하고 공략보다는 공존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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