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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김일성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저작시기 2005.03 |등록일 2006.04.2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6페이지 | 가격 800원

소개글

김일성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적었습니다.

목차

머리말
1. 김일성의 어린시절
2. 재만한인 민족운동의 동향과 국민부 좌파에서의 활동(1929-1931)
3. 만주사변의 발발과 반만항일(反滿抗日)운동 참가(1931-1935)
4.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의 고조와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1936-1938)
5. 만주항일유격운동의 퇴조와 소련으로의 월경(1938-1941)

맺음말

본문내용

5. 만주항일유격운동의 퇴조와 소련으로의 월경(1938-1941)
1937년경부터 항일유격운동 세력에게 커다란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했다. 월등한 무력을 앞세운 일제의 탄압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 때 김일성의 목에는 양정우ㆍ조아범ㆍ진항장ㆍ최현과 함께 1만원의 상금이 걸렸다. 마침내 1937년경 1만여 명이었던 항일연군은 1939년 말에 약 2500명, 1940년 5월에 약 1500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일제는 중일전쟁의 개시 이후에도 만주에서의 토벌작전을 늦추지 않았다. 집단부락을 통해 상호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하는가 하면 항복한 자를 처형하지 않고 귀순자로 받아들이는 전술을 채택하여 선전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제1로군도 대단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제1로군은 주요 지도자들을 잃었다. 즉 1938년 1월에 남만성위 서기 이동광의 사망, 2월에 제1군 참모장 안광훈의 검거, 6월에 제 1군 제1사장 정빈의 투항, 1940년 2월에 제1로군 총지휘 양정우의 사망, 참모장 방진성의 검거, 제 1방면군 참모장 임영산의 투항 등 이었다. 달리 보면, 중일 전쟁 발발이후 `후방교란`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인 유격운동을 전개해야 했는데, 그 반대로 내부상황은 현재의 역량을 보존하며 항일할 것을 요구했다. 1940년 들어와 그의 부대는 더욱 위기에 처했다. 비록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가 1940년 3월 화룡현 홍기하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겨규ㅏ고, 이어 안도현 대마록구에서 마에다중대를 섬멸하여 성가를 높였다고 하지만, 이미 제1로군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 요인으로 위중민은 "여름철 가장 행동하기 쉬운 시기에 식량이 부족하고, 또 부락건설이 공고히 되었으며 더욱이 벽촌에까지 닿는 자동차 도로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겨울철에는 활동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그래서 그들은 정신의 안정을 꾀하고, 배반의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해 숙청 정리하여, 조직의 재정비를 하기 위해 월경을 결정하였다. 1940년 2월 23일,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가 사망했다. 이에 위중민은 3월 중순경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제 2차 두도류하 회의를 열고, 소부대 형식의 활동 및 무장부대의 중ㆍ소 국경지대로의 이동 등을 결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의 항일 유격대는 소련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다. 김일성 부대도 1940년 11월 소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보르시로프야영(남야영)으로 이동하였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에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부터 제1로군의 군 계통서만이 아니라 당 계통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한인 대원들 전체가 처음 한 곳에 집결한 시점부터 한인들 사이에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때문에 한인 대원들이 가장 많이 결집해 있던 교도려의 제1영 책임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만주에서의 활동하던 조중연합의 항일유격대가 소련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북만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하바로프스크 시 근처의 비야츠코에 동남만에서 활동하던 부대는 보로시로프에 야영을 짓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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