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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청산리 전역

저작시기 2005.10 |등록일 2006.04.2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2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청산리 전투의 확대 개념을 알아본다

목차

머리말
서론
독립군의 근거지 대이동과 그 이유
일본군의 간도 출병
본론
청산리 전역의 정의와 청산리의 위치
청산리 전역의 과정
1. 백운평 전투
2. 완구루 전투
3. 천수평 전투와 어랑촌 전투
4. 맹개골 전투와 만기구 전투
5. 쉬구 전투
6. 천보산 전투
7. 고동하곡 전투
청산리 전역 이후 독립군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머리말

청산리 전역은 1920년 10월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대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일대에서 훈춘사건을 구실삼아 간도를 침입한 일본의 토벌군과 맞서 싸워 이긴 전역이다. 이 전역은 한민족의 무장투쟁에서 규모가 제일 크며 대표적인 전역이다. 그렇지만 이 전역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만연하여 청산리 전역의 역사적 진실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청산리 전역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을 토대로 올바른 청산리 전역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서론

독립군의 근거지 대이동과 그 이유

봉오동에서 홍범도의 승첩 이후 충격을 받은 중국 주재 일본영사관은 1920년 8월 1일부터 3일까지 간도 총영사 주재로 개최된 각 영사 분관 주임 협의회에서 영사관의 정보와 첩보기능을 강화시키며 경찰 조직의 정비를 단행, 전투력의 강화에 몰두하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중국군을 움직여 한인 독립단체를 토벌하려 하였다. 따라서 중일 합동 수사와 필요의 경우 일본군이 직접 소탕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중국 봉천 당국에 요구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직접적인 간도 출병의 위협으로 봉천당국은 국경을 넘어오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일본 고문 감시 하에 중국군을 동원하여 토벌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을 은근히 동정하던 연변지방 당국의 관리들과 장교들은 이 사실을 독립군에 통보하고 형식상의 토벌을 하는 대신 근거지 이동을 요구하였고 독립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연변지역의 독립군단체들은 1920년 8월 초부터 근거지 대이동을 개시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명월구와 이청배의 독립기지를 떠나 8월 중순경에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일대로 옮겨 남완록구와 북완록구를 중심으로 새로운 군사기지를 창설했으며, 그 뒤를 이어 안무의 대한국민회군과 대한의군부,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등 반일무장단체들이 차례로 이곳에 도착하여 홍범도 부대와 합세함으로써 강력한 연합부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위치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러시아로 파견한 무기운반대가 돌아오지 않아 근거지 이동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결국 9월 6일 맹부덕이 거느리는 중국군이 십리평으로 들어와 근거지 이동을 촉구하자, 9월 9일 급급히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거행하고 부대를 재편성한 후 17~18일에야 비로소 장정길에 올랐다. 그 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한 달간의 간고한 행군을 거쳐 10월 중순경에 화룡현 청산리일대에 도착했다.

참고 자료

청산리전쟁 전후 북간도지역 일본영사관의 동향과 그 성격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연구
滿洲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
발로 쓴 청산리전쟁의 역사적 진실

한민족독립운동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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