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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열]다산정약용의삶과주변

저작시기 2006.04 |등록일 2006.04.25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9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리포트제출과제를 준비하면서 여러자료들을 보게 되고 알게 되었다.
제출량이 많기는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면서 다산의 생애와 업적, 주변정세나 그 외 기타부분까지 많이 알게 되면서 단지 과제물로서만이 아니라 나에게 앞으로도 시간이 날적마다 읽어보고 또한 나의 자녀들에게,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다산의 삶과 인재성에 대하여 얘기해줄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지식보관물겸 리포트겸해서 정리하다보니 양이 방대해진것 같다. 특히 모르는 한자를 해석하여 토를 다느라 고생했지만 마음한쪽에선 언제든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얘기해줄수 있는 자료를 정리하게 되어 뿌듯하기만 하다.

목차

Ⅰ. 본 문
Ⅱ. 다산의 삶
◈ 다산의 성장기
◈ 개혁정치의 큰 뜻을 품고
◈ 강진 유배지에서
◈ 말년 고향에 돌아와
Ⅲ. 다산의 주변
◈ 다산의 선조
◈ 다산의 형제
◈ 다산의 후예
◈ 다산의 외가
Ⅳ. 맺음말
◈ 교 훈
◈ 배울점

본문내용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 동상, 서울 남산공원
정약용 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생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翁)·태수(苔)·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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