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문학]채만식의 문학과 풍자의식

저작시기 2005.10 | 등록일 2006.03.14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9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채만식 생애와 문학, 그의 소설 "태평천하" 와 "탁류"에서 나타나는 풍자의식을 중심으로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채만식이나 풍자에 관련된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께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목차

Ⅰ. 생애와 문학
1. 작가 체험과 환경
2. 채만식 문학의 특징

Ⅱ. 「탁류」의 배경과 주제의식
1. 배경의 상징성
2. 인물들의 성격과 주제의식

Ⅲ. 「태평천하」의 풍자의식
1. 풍자의 의미
2. 「태평천하」에 나타나는 풍자의식
3. 각색 영상과의 비교

Ⅳ. 결론

본문내용

채만식은 1902년 전북 옥구군 임피면 취산리(혹은 축산리라고도 함)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17세까지 거기서 살았다.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고 군산-익산간에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일제는 김제·만경 평야를 비롯한 전라도 지방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하여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이 두 도시를 이웃하여 살고 있던 임피면의 채만식은 어릴 적부터 그 엄청난 수탈의 현장을 보아왔기 때문에 자기 작품 「탁류」에 그것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그 시기를 전후하여 관리들이 농민들을 착취하여 그들의 삶의 터전인 전답까지 빼앗아가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는 농민들의 참상도 보았을 것이다.
그 후 주목할 만한 사건은 3·1운동과 결혼이다. 그는 자신의 수필 「기미 3·1날」에서 군중과 함께 시위를 하고 해가 저물어 하숙으로 돌아와서는 상급생의 명을 받아 독립신문을 돌리게 되었던 것을 가슴 벅차게 느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3·1운동 낌새를 알아챈 그의 부친이 그 해 4월에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그의 발목을 묶어버렸다. 이렇게 본의 아닌 결혼을 하고 난 후, 그는 차차 결혼 제도의 모순과 봉건적 관행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고, 서울 유학과 도쿄 유학을 통해서는 그동안 엄격한 유교적 가정 교육의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근대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신의 근대 지향 의지를 굳혀 나갔을 것이다. 1923년에는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간또 대지진으로 일본 유학 1년 반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그 때, 한국인이 당한 학살과 수모를 보고 민족적 분노도 컸지만 당시 가장 그를 어렵게 만든 것은 귀국후 당면한 집안의 파산이었다. 가족의 궁핍과 더불어 당시 한국사회의 경제적 어려움과 때마침 일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 등은 채만식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데 상당한 작용을 가했을 것이다.
해방 이듬해,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던 채만식은 이리에 살고 있던 형의 집에 병든 몸을 의탁하였으나, 이미 형의 집안 역시 광산업에 실패한 후 완전히 가세가 기울어 형수가 행상을 하면서 근근히 집안 살림을 꾸려 가는 지경이었다. 아무리 병든 채만식이지만 더 이상 중형에게 누를 끼칠 수 없음을 깨닫고 셋방살이를 하면서 해방이 가져다 준 창작의 자유를 마음껏 향유했다.
그는 이 무렵 셋방에서 책상도 하나 없이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거기서 병든 몸을 달래가며 열심히 글을 읽고 써 나갔다. 자기 집 하나를 갖겠다는 꿈을 이때까지 간직해 오던 그는 이 무렵 [탁류]를 비롯한 몇몇 창작집의 인세로 돈이 조금 생기자 1947년 다섯 간 정도의 양기와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도 잠시, 그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하여 가까스로 마련했던 집을 팔아 변두리의 초가 삼간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 무렵 시인 장영창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은 채만식의 외로운 만년 생활을 잘 증언해 준다.

참고 자료

없음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