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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임나일본부설

저작시기 2005.11 | 등록일 2006.02.14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3,900원

소개글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밝힘으로써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대한 주장을 과학적으로 반박 또는 분석한 자료입니다. 강의 발표수업에 사용했던 자료로써 교수님께 극찬을 받았던 자료입니다.

목차

1. 임나일본부설은 무엇인가?
2. 사료에 의한 임나일본부설의 주장과 반박
3. 사료로 보는 당시의 정세
4.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

본문내용

1. 임나일본부설은 무엇인가?

임나일본부설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지금도 고대한일 관계사에 초미의 관심대상인 임나일본부설은 고대의 일본이 4∼6세기 2백년간에 걸쳐 한반도 남부를 근대의 식민지와 같은 형태로 경영했으며 그 중심적 기관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일본 지식인의 의식 속에서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서구열강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정한론이란 일본 국군주의자들의 주장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인적ㆍ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대안으로 한국을 침략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리하여 한국을 강점한 이후에 임나일본부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시키는 역사적인 근거로 활용되었다.

임나일본부설의 확립과정

일본의 육군참모본부 중위 사카와 카게노부에 의해서 1884년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되었다. 그는 일본 육군성이 보낸 스파이었다. 그는 광개토대왕릉비를 탁본하지 않고 비석에 종이를 대고 글씨를 직접 배껴왔다. 5년뒤 일본참모본부는 보수기관지인 회여록에 사카와가 가져온 비문의 일부를 공개하였다. 이것은 왜가 백제와 일본을 지배했다는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 설을 집대성한 인물은 스에마츠다. 스에마츠는 1949년 출간한 그의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집대성하였다

2. 사료에 의한 임나일본설의 주장과 반박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

① 일본서기(720) 권9 신공황후 섭정 49년조
(369년) 춘삼월에 황전별(아라타와케)ㆍ녹아별(가가와케)을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라는 사람과 더불어 병사를 이끌고 바다(현해탄)을 건너 탁순국(창원)에 이르렀다.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병사의 수가 적어 신라를 격파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다시 사백과 개로라는 사람이 군사를 청하여 그것이 받아들여져 목나근자ㆍ사사노궤를 보내었다.【이 두 사람의 성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목나근자는 백제장수이다.】정예병사를 데리고 사백과 개로를 보내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일곱나라를 평정하였는데 비자발(창녕)부터 남가(김해)ㆍ탁구(영산)ㆍ앙나(함안)ㆍ다락(합천)ㆍ탁순(창녕)ㆍ가라(고령)이다.

참고 자료

역사스페셜 97편 실체 임나일본부설, 116편 철저분석, 일본역사교과서
김경복, 이희근(2001), 가야는 신비의 왕국이었나 : 이야기 가야사 서울: 청아출판
이영식 (2001)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의 역사, 내일을 여는 역사 제6호 pp.85~96
김태식 (1997) 광개토대왕릉 비문 논쟁과 임나일본부설, 역사비평 계간 36호 pp.386~397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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