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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성주 한개마을의 역사

저작시기 2005.10 | 등록일 2006.01.30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9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한국문화유산수업.보고서

목차

Ⅰ. 한개마을의 지리와 환경
Ⅱ. 한개마을의 역사
Ⅲ. 한개마을의 구성
Ⅳ. 한개마을의 세시와 민속놀이

본문내용

Ⅱ. 한개마을의 역사
1. 마을의 내력
한개마을은 성산이씨(星山李氏)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서 크고 작은 한옥들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촌이다. 성산이씨의 시조는 이능일로서 후삼국시대와 고려초기의 인물이다. 태조23년(940)에 전국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성산군과 주변의 5현을 통합하여 경산부로 승격시켜 이능일이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오늘날의 성주읍 경산리 일대는 이능일의 세거지로 알려져 있고, 그 자리에는 당시에 만들어 이용하였던 우물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영남여지승람』 신이장(神異章)에 의하면 조선 숙종 6년(1680)에 성주목사 신학이 꿈을 꾸었는데, 이능일이 신인으로 나타나서 “이곳 사창의 땅은 나의 집터로서 아직도 우물이 남아 있음에도 우마차로 짓밟아 더러운 웅덩이가 되었으니 원컨대 이곳을 다시 깨끗하게 하여 주시오.”라고 현몽하였다. 이에 목사는 이능일의 세거지를 찾아 조사하고, 우물터를 정돈하여 8각의 보호각을 세웠으며, 친히 이공신정(李公神井)이라는 현판을 만들어 걸었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 이후 이능일의 세거지에는 광무 4년(1900)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단소(壇所)를 만들고, 경원사와 삼오당을 세워서 조상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때에 이우(李友)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세종대왕은 성주고을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신 분이었다. 세종 21년(1439)에 사헌부의 주청으로 사고(史庫)의 확충을 계획하였는데 이때에 오늘의 성주읍 경산리에 성주사고(史庫)를 설치하고 역대 국왕의 실록과 왕실족보의 한 질을 이곳에 보관케 하였다. 그리고 월항면의 시진산 아래의 나지막한 구릉에 대왕의 18왕자의 세손의 태장지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태실의 설치공사는 세종 20년(1438)에서 동왕 24년(1442)까지 계속 되었는데, 이우의 한개마을 이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우가 오늘의 한개마을을 새로운 거처지로 지목한 것은 세종이 만드신 태장지에 가깝다는 것을 들 수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풍수를 아는 당대의 지간의 말에 이끌려서였을 것이다. 한개마을은 성주읍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앞으로는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백천과 서쪽에서 흘러드는 이천이 마을 어귀에서 합수하여 동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삼봉(三峰)이 있어서 마을을 적당히 감싸고 있다. 그리고 마을의 외곽으로서 동북쪽으로는 주산인 영취산에서 8㎞ 떨어진 곳에 서진산이 이어지고 다시 금오산 소백산으로 연결되며, 남서쪽으로는 성산과 멀리 가야산으로 이어진다.
목사공 이우가 한개마을의 입향조가 되고 오늘날의 한개마을을 이룩한 사람들은 목사공의 삼남인 이양의 후손들로 이양의 차남인 이시령의 후손들이 지금의 한개마을에 자리잡았는데, 그의 아들은 발(勃)이고 손자는 성범(成範)이며, 증손은 약(若), 현손은 정현(廷賢)이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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