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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부여에 대한 레포트

저작시기 1997.01 | 등록일 2006.01.26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9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초기 북쪽에 자리를 잡았던 국가 부여에 대한 역사와 발전 그리고 쇠퇴 그리고 신화 문화와 풍습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4. 부여의 대외 관계

(1)중국과의 관계
부여 초기부터 중국의 왕조들과는 빈번한 교류를 하고 우호적 관계를 지속한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였고 일시적으로 정략결혼 공·수 동맹 등을 하였다.
서한초기에는 관계가 비교적 적었으나 한 무제 이후 밀접한 관계에서 예속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AD.111년 부여 왕이 낙랑을 노략하고 167년에는 부여 왕이 현도군을 약탈 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간혹 적대적 행위가 있었으나 다시 국교가 회복이 되었다.
2세기를 넘어가면서 부여는 고구려의 발전을 자국의 힘으로 통제 할 수 없게 되자 후한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전개하였다.

(2)고구려와 부여의 관계
주위의 다른 족과의 관계 중 밀접한 관계가 고구려이다. 처음 그들 사이에는 같은 예맥통의 나라로 우호적 관계이고 군사적 연맹이 성립되어 있었으나 고구려가 부여를 능가한 이후에는 곧바로 부여를 병합하려는 시도를 하여 이에 부여는 중국의 한과 공동으로 고구려에 대항 하게 되고 그 결과 고구려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어 결국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가 아직 강성하였던 1세기에 그 남쪽에서는 고구려가 새로운 세력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예속 및 화친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부여는 힘에 의해 고구려 왕실을 계속 예속시키려하였다. 처음에 부여는 고구려에 볼모 교환을 요구하여 고구려는 이에 응하였으나 고구려 태자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자 부여에서는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아직 부여에 대응할 힘이 없었고 국력을 차츰 키워 나아갔다. 그 후 고구려의 세력이 급격히 강화됨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힘의 비율이 비슷하게 되었다.
AD.13년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하다 매복에 걸려 큰 타격을 받았다. 이것은 고구려가 부여에 대해 군사력이 뒤지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22년 고구려 군대가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는 전국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으나 국왕이 전사하고 지배층 안에서 분열과 동요가 됨으로써 많은 이들이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22년 이후 부여가 사신을 보내어 뿔이 세 개 달린 사슴과 긴 꼬리달린 토끼를 보내었고 호랑이를 바쳤다는 문서를 통해볼 때 고구려가 부여에 대해 주도권을 잡았다고 본다.

5. 부여의 신분제

(1)구조
왕 → 제가(귀족) → 호민(부농 등) → 하호(평민) → 노비, 노복
판단하는 기준은 부여의 무덤들에서 나오는 부장품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한-부여시기 토광 목곽 무덤등 에서 물동이, 항아리, 굽 접시 등의 토기, 공구등과 무덤들의 부장품의 종류와 양에 차이가 나는 것은 빈부의 분화가 상당히 심화된 사회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읍락의 통치자는 가였고 호민은 하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부유한 상민층을 가리키는 용어 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민은 민의 지위에서 벗어난 정치상의 계층 개념이 아닌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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