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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사]한국 축성기술의 꽃 - 화성(-화성에서 살펴본 18세기 한국 축성기술-)

저작시기 2005.10 | 등록일 2006.01.15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15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국 축성기술의 꽃 - 화성(-화성에서 살펴본 18세기 한국 축성기술-)에 관하여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여러 사료적 자료를 근거로 작성하였습니다.

목차

Ⅰ. 화성의 축성동기
Ⅱ. 화성의 시설
Ⅲ. 화성의 선진성과 한계
Ⅳ. 화성성역의궤
Ⅴ. 오늘날의 화성과 과제
별표 1. 이전성곽과 화성 비교표

본문내용

Ⅰ. 화성(華城)의 축성 동기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는 수원성은 1794년부터 2년 반 걸려 1796년 완성되었다. 정조 때였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세도세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품고 있던 정조는 아버지 묘를 명당의 자리로 모시는 것이 염원이었다. 마침 후보지로 수원 고을 뒷산(지금의 화산)이 물색됐고, 기존의 수원은 현재의 위치인 팔달산 아래로 옮긴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왕의 효성심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지만, 숨은 뜻이 따로 있었다. 노쇠한 왕(영조)의 52년 간 통치가 막을 내리자 새로 등극한 젊은 왕 정조는 강력한 왕권 구축을 절감하였다. 사도세자의 사건도 당파의 권력 쟁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왕권 확립을 위해서는 기득권 세력을 누르고 신진 세력을 기용하여 신하의 세력이 한쪽으로 불거지지 않도록 해야 했고, 재정적 뒷받침과 군사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한양에서 이 모두를 새로이 얻기는 어려웠다. 자신의 뜻을 펼 새 거점이 필요했다. 시대를 앞서간 신도시 건설의 발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왕의 의지 아래 탄생됐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사도세자 묘 이전에 따라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게 된 수원은 과거의 수원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큰 규모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한양 다음의 대도시 서열에 올라 광주부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었다. 일차적으로 행궁과 객사, 향교가 조성되었고, 얼마 후 도시 외곽에는 조선 땅 어디에도 이제까지 만들어진 적이 없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성곽까지 구비하게 되었다.
수원성의 축성 계획에는 조선 후기에 대두된 성곽의 방어 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과 실학파 학자들의 실용성을 추구한 학문적 관심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대학자 정약용이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꽃이 필 수 있었다. 정약용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당시 조선의 도시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곽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성과 중국 그리고 유럽 성의 장단점들을 고려하여 성의 둘레와 높이 등 성벽의 규모와 성벽을 쌓을 재료를 정하고, 축성 과정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시도하였다. 우선 작업과정에서 인부들이 일정한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작업 능률을 올릴 것을 생각하였고, 자재를 운반하는 새로운 수레와 거중기라는 돌을 들어 올리는 첨단 기계까지 고안해냈다.
이렇게 해서 계획된 수원성은 1792년, 정도 18년 정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2년 반 후인 정조 20년 9월에 완성을 보았다. 수원성이 완성된 것만큼 더 뜻 깊은 것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자를 발간 한 것이다. 단일 공사를 대상으로 하여 이를 활자화된 책자로 발간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에는 그 당시의 건설 공사와 관련된 참으로 방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내용들을 알려 주고 있다.

참고 자료

김동욱, 수원성 (대원사, 1989.05.)

김동욱,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수원성- (발언, 1996.02.)

이종학, 정조대왕․화성관련자료 전시도록 (사운연구소, 2000.10.)

김동욱,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개, 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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