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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리] 강화도 외규장각

저작시기 2005.06 |등록일 2005.07.13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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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강화도 부궁전의 성립 과정

2. 외규장각의 성립

3. 규장각과 외규장각

4. 외규장각의 소실

5. 의궤도서의 역사적 가치

본문내용

규장각은 많은 국내■외의 도서를 수장하여, 학식 높은 신하들이 관련 직책을 맡아 왕과 함께 정사를 논의 하는 한편, 개발된 과제를 연구하는 학술기구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정조는 조선왕조 500년간의 26명의 왕 가운데 초기의 세종대왕과 함께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군주로 평가되는데, 그의 훌륭한 정사는 이 규장각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구는 1796년 현재로 8만여 권의 책을 수장하고, 왕명을 받아 148종의 저술 및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아름다운 활자를 여러 종 개발하여 훌륭한 출판 사업을 촉진시키는 성과도 거두었다.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부속기관이었다. 즉 규장각의 도서들 가운데 항구 보존의 가치가 있는 책들을 별도로 보관하는 외곽 서고로서, 1781년 (정조 5) 3월에 강화도의 행궁지에 설치되었다. 강화도는 서울에서 약 60km 거리에 위치한 섬으로, 사방이 갯벌로 둘러 쌓이고 육지를 격한 일대에는 물살이 빨라 한 두 곳을 제외하고는 접근이 어려워 국방상 천연의 요새였다.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1230년대에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고려의 조정은 이 섬으로 들어가 수십 년을 버틴 일이 있었다. 또 1630년대에 여진족의 침략을 받은 조선왕조는 이 섬에 방어시설을 강화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는 정책을 펴고 18세기에는 이곳에 행국을 대폭 증축하기도 하였다.정조는 이 요새지에 영구 보존할 가치가 있는 서적들을 보관하고자 이곳에 외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는 다섯 곳 중의 하나가 이 섬에 따로 있기도 하듯이 이 섬은 국방상 안전지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천연의 요새는 19세기에 서양 증기선 군함들이 왔을 때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그 사이 개펄의 상태가 많이 달라져 접안이 용이해진 곳들이 많아졌을 뿐더러, 서양의 신식 무기의 화력을 감당할 수 있는 이점은 없었다. 1866년 9월에 프랑스 해군 극동 분함대는 서양 군대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에 상륙하였으며, 그들은 11월 철수하면서 전리품으로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어람용 왕실 의궤도서들을 비롯한 중요 서적들을 가져갔다.

참고 자료

<<외규장각 도서 무엇이 문제인가?>> - 프랑스군 침입로 1999 서울대학교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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