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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저작시기 2005.05 |등록일 2005.06.25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6페이지 | 가격 900원

본문내용

옛 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쓸모 있게 만들어 놓아야 비로써 가치가 생기게 된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다산 정약용의 다산학도 학문이념도 이 속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학문을 대성하였더라도 배운 이치를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한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다. 성리학이라는 공리공론의 행세 학이 맥을 쓰지도 못하고 시대의 부패와 타락을 가속 시킬 때 다산 정약용은 공맹 사상의 본원으로 들어가 요순시대 실현을 주장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사상은 크게 두 갈래의 큰 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립으로 출현한 철학적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꿈꾸었던 현실개혁의 구상과 방도이다. 서양의 르네상스가 암담한 중세시대를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 정신과 사상을 찾아 새롭게 꽃피웠다면 우리는 200년 전 다산 정약용으로 돌아가 현시대의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영조 38년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우리나이 4살 때 천자문을 아버지께 교육받으며 주위의 이목을 주목 받던 그는 열 살 미만에 그의 호(삼미자)를 딴 삼미집을 엮었다. 다산은 유년기에 매우 개구쟁이여서 그의 큰형수가 직접 다산을 돌봐왔는데 이 큰형수의 친정아우 이벽으로부터 다산의 천주교 화란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인 1776년 2월 15일에 관례(성인식)를 치루고 16일 한양으로 올라와 서울 명문가인 홍씨 집안 막내딸과 혼례를 치르게 된다. 이로써 다산은 서울 출입이 가능 하게 되고 서울의 이모저모를 익히며, 남인계 소장들과 어울리며 미래를 설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꿈에 부풀게 된다. 그리고 16세에는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성호의 학문을 더욱 집대성 할 것을 다짐한다.

참고 자료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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