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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광개토왕릉비의 검토

저작시기 2005.06 |등록일 2005.06.24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광개토왕릉비의 검토

목차

1. 비문의 특성과 내용

2. 비문의 연구
1)왕비의 발견과 일본의 연구
2)일본외의 연구
①정인보의 연구
②김석형의 연구
③박시형의 연구
④이진희의 연구
⑤왕건군의 연구
3)전치문설

3. 비문에 나타난 당시 정세
1)비려
2)백제
3)신라
4)동부여
5)왜

4. 수묘인 제도

5. 맺음말

본문내용

2. 비문의 연구

1)왕비의 발견과 일본의 연구
왕비가 있는 국내성 지역은 427년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에도 비록 정치 군사적 비중도는 떨어졌지만 당의 안동도호부 시기, 발해 시기, 요, 금에 이르기까지 집안현 지역은 주요 치소로 기능했다. 이것은 아마도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었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다 원대 이후 중ㄱ그의 변방으로서 쇠락화 하다가 청조 성립 이후 장백산맥 일대를 封禁之地로 삼아 출입을 금하자 더욱 황폐화되어 광개토왕릉비도 서서히 망각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이래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의 편린이 보이나, 「용비어천가」나 심광언의 싯귀에는 이를 금나라 황제의 무덤과 비석으로 오해하였고, 이런 의식은 1872년의 「강제지」에 까지 연장되고 있다.
그러다 1876년에 이 지역에 대한 봉금이 해제되어 회인현이 설치되면서 설치위원으로 파견된 장원과 그 부하 관월산이 재발견하여 탁본을 떠옴으로서 북경의 금석학자에게 알려졌다. 본격적인 연구는 보다 정확한 탁본을 위하여 북경에서 정교한 기술을 가진 이운종 등이 현지에 가서 정탁본을 작성하고 난 이후부터이다.
일본에서의 연구는 1880년에 만주로 파견된 일본 참모본부 소속 간첩 사케아 가게아끼가 1883년에 4면 132장으로 된 쌍구가묵본을 입수하여 1884년에 귀국한 것이 시작이다. 참모본부에서 일본 관학자들을 동원하여 비밀리에 연구하여 5년 후인 1889년에 간행된 『회서록』5집에 「고구려비출토기」를 수록하고 관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여기서 소위 신묘년 기사를 찾아내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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