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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사학]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의 진실

저작시기 2005.05 |등록일 2005.06.19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700원

소개글

비디오 감상문으로 제출한 내용입니다.

목차

서 론

본 론
- 김일성의 항일 무장 독립활동
-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바라보는 시선

결 론

본문내용

1930년대 만주지역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의 독립군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루 저녁에도 몇 백 리를 간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당시 만주 뿐만 아니라 국내의 주민들에게 조국독립의 희망을 안겨주고 있었다. 30년 ∼40년대 의 암흑기에 거의 모든 독립운동이 지하화되고,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할때였기 때문에 그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은 그 빛을 더욱 발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어머니인 강반석이 살았던 중국 '안도'의 '소사하 마을'에서 처음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안도에서 조직한 유격대를 이끌고 김일성은 '왕청유격대'에 합류한다. 이후 김일성은 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서 1933년 봄, 이른바 '소왕청 전투'에 참가하여 일제토벌대를 상대했다. 당시 왕청유격대원들의 유격 근거지는 산악지형으로 산 밑에 촌락을 만들어 식량 및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체계적인 군대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또 1940년 3월, 김일성 부대는 '대마록구 전투'를 치르게 된다. 대마록구 또는 홍기하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김일성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이 매복작전을 펼쳐 일제토벌대 145명의 마에다 부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전공을 세운다.
1930년대에 중국 공산당의 영도하에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김일성은 1940년 11월경 소련에 입경함으로써 이후 1945년까지 소련 극동지역에서 주로 정치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중단한 채 해방을 맞게된다.
이렇게 만주일대에서 할동하고 있던 김일성이 국내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된 큰 계기는 바로 '보천보 습격사건'을 통해서 이다. 1937년 6월 4일 압록강 연안, 함남 갑산군 보천보의 일본주재소등을 김일성 부대가 습격한 것이 보천보 전투인데. 이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국내에 있는 일본 시설물 파괴라는 상징적 의미로 인해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호외를 발행하여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함으로써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 자료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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