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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 신라장적(민정문서)를 통하여 본 통일신라의 촌락 성격과 농민

저작시기 2003.11 |등록일 2005.06.10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8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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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며

2.본론
1)문서의 성격과 작성목적
2)신라장적의 연구동향
3)촌의 성격과 농민
4)공연(孔烟)에 대한 해석

3.마치며

본문내용

9등호제에 대하여 야촌충부는 빈부의 차에 따른 구분으로 파악하였고, 전봉덕은 唐 開元 7年令의 戶令에서와 같이 자산(資産)의 다과에 따라 구분된 9등호제(9等烟制)가 채택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박시형은 9등호 구분의 표준이 인구의 다소, 토지점유의 다소였을 것으로 추측하였고, 오장환은 경제적 처지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전외가 9등호제는 인정의 다소에 의한 구분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이래, 명석일기, 겸약일지, 림건상 등도 인정의 다소에 의한 구분이라는 입장에서 9등호의 구분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와는 달리, 이태진은 공연의 등급평가에 조정의 수와 전답의 보유조건이 참작되었을 것이라 보아, 토지가 9등호의 구분에 하나의 기준이 되었음을 상정하였다. 이인철은 신라의 9등호제가 인정의 다과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토지(연수유전답)의 다소에 의해 등급이 구분되었다고 풀이하였다. 이인철의 견해를 받아들인 김기흥은 토지에 노비와 우마를 합친 자산의 크기에 따라 9등호의 구분이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토지를 중심으로 한 자산의 크기에 따라 9등호의 구분이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게 되면서 기전외의 견해는 어느 정도 극복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89년에 안부정정(安部井正)이 기존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특한 인정기준설(人丁基準設)을 제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요컨대, 신라 9등호제가 인정의 다과에 의한 것이었다는 종래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신라 통일기 사회를 국가의 수탈기준이 인정 즉 노동력의 부담능력에 있었던 것으로 봄으로써 통일신라시대를 고대노예제사회를 규정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라 9등호제를 인정이 아닌 토지의 다과에 의한 구분으로 본다면, 신라 통일기의 사회성격은 고대노예적인 것이 아니라 중세봉건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참고 자료

李仁鐵, 「신라장적에 보이는 촌의 형태와 성격」
金基興, 『삼국 및 통일신라기 세제의 연구』, 역사비평사, 1991
金基興, 「신라 촌락문서에 대한 신고찰」『한국사 연구』64, 1989
姜晋哲, 「신라통일기의 토지제도」, 『고려토지제도사 연구』, 고려대출판부, 1980
李仁哲, 「신라장적에 대한 몇가지 論議」, 『한국고대사연구21』, 2001
李仁哲, 『신라의 촌과 촌민지배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원박사학위 논문, 1993
李泰鎭, 「신라통일기의 촌락지배와 공연 - 정창원 소장의 촌락문서 재검토」, 『한국사연 구25』, 1979
李喜寬, 『統一新羅土地制度史 연구』, 일조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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