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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화사]원효의 생애와 사상

저작시기 2004.10 |등록일 2005.06.10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9페이지 | 가격 1,400원

소개글

우리나라 승려 가운데 가장 친숙하고 유명한 사람은 원효일 것이다.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불교사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한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원효”라는 이름을 들어 본 것은 있을 것이다.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개달음을 얻어 도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나 김춘추의 딸인 요석공주와의 사랑과 설총을 낳은 이야기, 후에 스스로 파계한 뒤에 속인들 속에서 ‘무애가’라는 노래를 지어 불교를 전파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만큼 그의 행적이 당시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원효가 살았던 시기의 불교와 시대적 상황
2. 원효의 생애
3. 원효의 사상
4. 원효의 저서들
5. 원효설화

Ⅲ. 결론

본문내용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은 법흥왕대(514~544)에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수용의 주체적 역할은 국가 왕실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 불교의 초기적 입장은 그 수용 주체 측, 즉 왕실의 의도에 부응하려는 성격이 매우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신라의 국가 왕실이 불교를 수용하게 된 근본 목적은 흥국 이념, 즉 나라를 부흥케 하고 국민을 이익케 하려는 국가적 이념이었다. 원효가 살던 시대는 말 그대로 격동기였다. 신라는 진흥왕 이래의 영토 확장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렸고, 진평왕 이후 선덕여왕, 진덕여왕에 이르면서 성골 귀족이 사라지자 진골 귀족이 왕위를 계승하기 시작했다. 중국 대륙에서도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성립하는 변화를 겪던 시대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이후 선덕 여왕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대부분 왕들은 불교를 진흥하고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불교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국가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608년 고구려가 자주 신라 변경을 침범하자 진평왕이 승려 원광에게 걸사표(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부탁하는 글)를 쓰게 했을 때, 원광은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가 할 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대왕의 나라에 살고 대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쫓지 아니 하겠습니까”라며 이를 따랐고, 선덕여왕 때 자장이라는 승려는 신라왕실이 석가모니종족과 같기 때문에 여타 신라인들과는 다르다는 ‘진종설’을 내세우며 신라 왕실을 옹호하였다. 이렇게 신라의 불교는 왕실 및 진골 귀족과의 관계 속에서 발달하였다. 이는 당시 불교가 대중들과 융합되지 못하고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 실정에 맞는 통일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중국 이론들을 수용하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 「역사로 읽는 원효」, 김상현, 고려원, 1996
- 「원효, 그의 위대한 생애」, 원효사상전집, 불교춘추사, 1999
- 「원효에서 다산까지」, 김형효, 청계, 2000
- 「원효의 정토사상 연구」, 후지 요시나리, 민족사, 2001
- 「원효 설화의 미학」, 오대혁, 불교춘추사, 1999
- 「원효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김형효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 「원효의 생애와 사상」, 황영선, 국학자료원, 1996
- 「원효, 한국 사상의 새벽」, 고영섭, 한길사, 2002
- 「한국 전통문화와 역사의식」, 신형식, 三知院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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