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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 사무라이와 일본역사

저작시기 2005.04 |등록일 2005.06.0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4페이지 | 가격 500원

소개글

일본사 수업중 발표수업에 쓸 자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에 대해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실거예요.

목차

Ⅰ.서언

Ⅱ.본론
1.사무라이의 등장배경
2. 막부시대에 무사
3. 군사엘리트에서 문화 엘리트로
4.사무라이의 특권
5. 일본의 사무라이VS한국의 선비

Ⅲ.결언

본문내용

10세기경 인민과 토지를 호족이 사유한 고대 ‘씨성제’하에서는 호족들 간에 서로 더 많은 인민과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이 호족들 간의 싸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강력한 왕권이 출현하여 호족을 억누르고 인민과 토지를 국가가 보유하는 ‘율령제’밖에는 없었다. 당시 율령제는 당나라나 한반도 삼국에서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호족세력을 누르고 율령제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세력은 거기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이나 유학승들밖에는 없었다. (견당사) 이럴 때에 당과 신라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가씨를 타도하고 씨성제사회를 율령제사회로 전환시키는 개혁을 단행했다. (645년 다이까 개신) 그러나 모든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관료나 일정한 연령에 오른 사람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했다가 죽을 때 국가가 그 토지를 환수하는 율령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지를 지급받아야 할 관료나 인민의 수는 늘어나는데 나누어줄 토지는 부족해 결국 8세기 후반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시행될 수 없게 되었다.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자 국가가 토지 회수나 분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몰락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게 되고, 힘이 잇는 신사(紳士)나 사원, 그리고 귀족이나 지방호족들은 유랑농민들을 모아 토지를 개간하거나 방치된 토지를 모아 방대한 장원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시 토지의 사유가 인정되는 장원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장원의 소유자인 영주는 국가 공권력이나 다른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의 장원을 명목상으로는 중앙의 유력한 귀족에게 기증하고, 자신은 실질적인 재지영주로서 그 퇴를 계속해서 소유, 관리해나갔다. 당시 가장 유력한 귀족인 후지와라씨는 기증받은 토지가 한때 전국 장원의 12분의 1이나 되었다. 율령제하에서는 국가가 인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대신에 인민에게 병역의무를 지웠으나 율령제가 무너지고 장원제가 시행됨으로써 인민에게 병역의무를 지울 수 없게 되자 조정은 각 지방의 치안을 그 지방 호족들에게 일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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