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한국역사] 경복궁과 독립문

저작시기 2004.06 |등록일 2005.06.0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0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경복궁과 독립문에 대해 쓴 글입니다
두 장소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과
객관적인 정보 두 가지를 모두 실었습니다
A+을 받은 조별 레포트 입니다

목차

[경복궁에 대해서]

<제일 먼저 본 광화문>
-잘못 복원된 광화문
-광화문 앞의 해태
-광화문에서 보았던 봉황

<흥례문>
<경복궁을 떠받치는 두개의 산>
<근정전>
-울퉁불퉁한 바닥의 의미-
-근정전의 용은 무슨 의미?-

<사정전과 강녕전 그리고 해시계>
<교태전>
-하늘과 땅의 만남-
-용마루가 없는 건물-
-새가 둥지를 틀지 못하는 건물들-

<향원정>
-잘못 복원된 구름 다리-

<아미산>
<경희루>
-서유기와 경복궁-

<독립문>
-독립문-
-서재필-
-대한민국의 미래-

본문내용

광화문 앞에는 해태 두마리가서 있었다. 과연 이 두 마리 해태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원래 이 두 마리의 해태들은 지금보다 훨씬 앞에(대략 80m정도) 있었다고 한다. 사신을 맞을 때, 그리고 신하들이 입궐할 때 조선왕조의 권위를 보여주며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이다. 그 앞으로 널다란 길이 있었을 것이다. 넓은 평지 속에서 보여 지는 광화문과 그 앞에 있는 길. 그리고 그 앞에 있는 해태.
지금처럼 빌딩의 숲 속에서 아무런 권위 없이 그저 지나가는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다.
광화문은1969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복원되었다. 하지만 복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 많았다. 원래 나무문이었던 대문은 철문으로 바뀌고, 박정희가 직접 쓴 광화문 간판이 달리게 되었다.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였던 그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 대해
이 정도의 지식밖에 가지지 못했던 것이 유감스럽다. 그가 쓴 글씨가 시멘트로 멋대로 복원했다고 하지만 문화적인 사적에 남길 만한 가치는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렇듯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는 광화문은 위치조차 바르지 않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의 남산 신사와 마주보는 위치로 옮겨졌는데 그 때와 같은 장소에서 복원시켰을 때 원래의 위치로 옮기기는 했지만 약간 비뚤어져있다고 들었다. 2009년쯤에는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의 지붕을 보면 용이 아닌 봉황이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에 어떤 시인이 남겼던 글이 기억에 남는다.
어쩐지 서글퍼 보이기까지 하는 광화문의 봉황을 지나 우리는 경복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학교 때 경복궁을 왔을 때 한 참 공사 중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수군거리던 것도 기억난다.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나라가 문화재를 만들어내는 나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안타까웠다.
그 때 학교 국사 선생님이 이 흥례문의 복원은 원래처럼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춰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복원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국가가 힘이 약해 흥례문은 헐리고 말았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복원되었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라는 사실이 기쁘다.
이 자리는 불과 10년전까지만 해도 구 조선총복부 건물이 있었다. 이 총독부 건물은 경복궁사분의 일을 훼손시켜 만든 것이다. 다른 위치도 아니고 이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에 의도는 분명하다. 우리 나라의 민족적인 자긍심을 훼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총독부 건물을 철거했을 때 철거하는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총독부 건물의 지하에는 정기를 끊기 위한 철주가 수도 없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찍은 구 총독부 건물 모습
구 총독부의 건물 모양은 완전한 日자 모양으로 시청의 本자 모습과 북악산의 <font color=aaaaff>..</font>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