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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장희빈의 실체

저작시기 2004.10 |등록일 2005.04.26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0페이지 | 가격 300원

본문내용

1662∼1701(숙종 27). 조선 숙종의 빈(嬪). 본관은 인동(仁同). 역관 장현(張炫)의 종질녀임

어머니의 정부(情夫)였던 조사석(趙師錫)과 종친인 동평군 항(東平君杭)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고, 1688년 소의(昭儀)로 승진되어 왕자 윤(#윤02: 뒤의 景宗)을 낳게 되자 왕은 기뻐하여 세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들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 정월에 세자를 봉하고, 장소의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자,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진노하므로,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중로 정읍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하지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 정권의 교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한다.

이해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올려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 80여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閔#암30)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사를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睦來善)·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옥사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은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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