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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저작시기 2004.11 |등록일 2005.02.03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1페이지 | 가격 1,400원

소개글

고산 윤선도에 대한 작가론입니다. 전공 과제로 작성한 작가론이고, 다양한 자료를 많이 참고한 보고서이니 도움 많이 되실겁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윤선도의 생애
3. 고산과 자연
4. 연군지정(戀君之情)
5. 고산과 음악
6. 윤선도와 보길도
7. 강호시가의 절창-어부사시사
8. 마무리

본문내용

2. 윤선도의 생애

윤선도(尹善道)의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으로 본관이 해남(海南)이며 선조 20년(1587) 아버지 유심과 모친 순흥 안씨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종가에 혈통을 이을 이가 없어서 8세 때 큰 아버지인 관찰공 유기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게 되었다. 이는 고산(孤山)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그가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양됨과 동시에 종가의 거대한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됨으로써 이러한 경제적 배경이 후일 고산의 화려하고 창조적인 자연생활과 시작 생활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고산의 일생은 출사와 유배 그리고 자연에의 은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산은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바르며 곧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부당함을 보면 묵과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의 출사는 순탄하지 못하였다.
윤선도에게 30세(1616, 광해8, 丙辰) 되던 해는 인생의 일대 전환기에 해당된다. 당시는 광해군(光海君)의 정치가 어지러워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던 때였다. 이에 윤선도는 그 유명한 <병진소(丙辰疏)>를 올린다. 그 내용은 먼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이이첨을 벌하고 다음으로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저버린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 등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산은 오히려 이이첨 무리의 모함을 받고 함경도(咸鏡道) 경원(慶源)으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경원에 도착한 고산은 오직 독서를 하거나 때로는 언덕이나 골짜기를 소요하면서 속마음을 노래하여 무려 43수의 한시를 남겼는데, 대체로 나라를 걱정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들이었다. 이듬해(32세, 1618, 광해 10)에는 「견회요(遣懷謠)」 5수와 「우후요(雨後謠)」 등의 시조를 지어 한시로 미처 나타내지 못한 감회를 노래하였다. 이 해(32세, 1618, 광해 10) 겨울에 윤선도는 경상도(慶尙道) 기장(機張)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 안기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해남에 귀향하여 두문불출하고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 1628년(인조 6)에 별시문과 초시에 등과하고 이어서 봉림대군(후일의 효종)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에 인조의 신임을 얻은 고산은 사부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다시 1629년 이후 4년간 공조좌랑 정랑과 형조정랑,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양대군의 사부를 겸임하였다. 그 후 163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曺正郞)을 거치고 성산현감에 임명되어 많은 공적을 남기고 1635년 사직하고 해남으로 귀향했다.

참고 자료

윤성근, 『윤선도 작품집』, 형설출판사, 1977.
김흥규, 「‘漁父四時詞’에서의 興의 성격」,『학국 고전시가 작품론』2, 집문당, 1992.
정운채, 『윤선도-연군지정과 이념의 시세계』,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5.
, 「孤山 尹善道論」,『조선 후기 한시 작가론』, 이회문화사, 1998.
민족문학사연구소 고전문학분과, 「격변기에 산출된 강호미학의 정점-고산 윤선도」,『한 국 고전문학 작가론』, 소명출판, 1998.
문영오,「尹善道論」,『韓國時調作家論』, 國學資料院, 1999.
신영훈, 『尹善道와 보길도』, 조선일보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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