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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국문] 선원 김상용의 시조분석

저작시기 2003.01 |등록일 2005.02.01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3페이지 | 가격 1,500원

목차

선원 김상용 인물 소개
오륜가 원문 및 분석
훈계자손가 원문 및 분석

본문내용

김상용 [金尙容, 1561 ~ 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안동
호 : 선원 ․풍계
별칭 : 자 경택, 시호 문충
주요저서 : 《선원유고》 《독례수초》
주요작품 : 《오륜가》(5편) 《훈계자손가》(9편)

본관 안동. 자 경택(景擇). 호 선원(仙源) ․풍계(楓溪). 시호 문충(文忠).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으며, 상신(相臣)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 ․응교(應敎) 등을 역임하고, 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였으며, 1598년(선조 31)에 승지(承旨)가 되고, 그해 겨울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정주(定州) ․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를 거쳐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허락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二王體: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체)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遺稿)에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인천의 충렬사(忠烈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선원유고(仙源遺稿)》, 저서에 《독례수초(讀禮隨抄)》, 작품으로 글씨에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平壤) 《군수 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豊德) 등이 있다.

五倫歌
부자지륜(父子之倫)․군신지륜(君臣之倫)․부부지륜(夫婦之倫)․장유지륜(長幼之倫)․붕우지륜(朋友之倫) 등으로 나눠 읊은 이 작품은 그의 문집인 《선원유고(仙源遺稿)》에 실려 전하는데, 그 중의 한 수는 다음과 같다. "형제(兄弟) 두 몸이나 일기(一氣)로 화시니/인간의 귀 거시 이 외(外)예 잇가/갑주고 못어들 거이 인가 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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