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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의 역사(정동의 추억과 역사속으로)

저작시기 2004.11 |등록일 2005.01.2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정동의 역사와 현재의 의미를 제 나름대로 해석해서 썼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이 주를 이루는듯 하나 논문과 책을 통해서 정확한 역사적 정보들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도시를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음 합니다.

목차

1. 정동과의 만남
2. 다시만났던 정동
3. 정동의 역사흐름속으로
4. 정동이 가지는 현재의 의미
5. 정동의 잠재력, 그리고 정동의 재탄생
6. 에필로그

본문내용

정동이 정동이라고 불리게 된 경위는 태조 이성계의 둘째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의 이름이 정릉이라서 정릉동, 정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 당시 계비인 강씨를 너무나 싫어해서 그의 묘를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재미난 일화로 태종이 계비인 강씨의 묘비까지도 청계천 수표교의 다리로 썼을만큼 싫어했다고 한다. 정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전에는 지금의 덕수궁도 존재하지 않았고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었던 조그마한 동네였다. 이 동네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역시 외세에 의한 상처때문이였다.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갔던 선조가 서울에 왔을때 머물궁궐이 없어서 찾았던 곳이 바로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이후 광해군때 행궁이였던 이 사저는 경운궁의 이름을 얻게된다. 경운궁은 광해군 시절 서궁유폐 즉 가시와도 같았던 인목대비를 유폐시켜던 곳이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고 인목대비가 후궁에서 대비로 복위되면서 경운궁의 의미가 있어지면서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경운궁은 일제강점기 시절 또다른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그것은 조선의 왕인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 즉 아관파천이 발생하면서 경운궁 일대인 정동은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주목은 민족의 아픔이 서린 씁쓸한 것이다. 경운궁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내가 본 정동의 공간은 대부분 이때 시절에 세워진 것이다.

참고 자료

김진애 "우리도시예찬"
서현 "그대가본 이거리를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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