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평가점수C

[서양사] 종교전쟁(1559~1610)에 의한 프랑스의 분열과 황폐 & 앙리4세의 프랑스 재통일

저작시기 2003.10 |등록일 2005.01.22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700원

소개글

전반적인 내용구성의 흐름은 `목차`와 `내용요약`을 참고하시구요,, 과제 작성에 도움 되세요~

목차

Ⅰ. 서론

Ⅱ. 종교전쟁(1559~1610)
1. 종교전쟁의 전개
2. 종교 전쟁의 위기

Ⅲ. 결론

본문내용

앙리 2세는 프랑수아 1세와 달리 위그노에 동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사랑한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 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녀는 앞으로 가톨릭 세력을 이끌어나가게 될 기즈 가문을 부상시켰다. 앙리 2세는 여러 차례 위그노에 대한 박해를 가했고, 동생 마르그리트를 사부아 공작에게, 딸 엘리자베스를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게 시집보내고 에스파냐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맺음으로써 친 가톨릭 정책을 분명하게 했다. 그러나 이 결혼식을 위한 행사로 열린 마상 대회에서 그는 장창에 눈을 찔려 1559년 사망하고 말았다.앙리 2세의 사망 후 앙리 4세가 즉위하기까지 프랑스는 그야 말로 혼란기였다.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때 강화되기 시작한 왕권은 종교전쟁으로 다시 약화되었다. 왕이 된 프랑수아 2세는 14살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왕비 메리 스튜어트의 삼촌인 기즈 가 형제들은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배제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어린 왕을 성인으로 인정했다. 그들은 권력을 휘두르고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신교와 대립했다. 그러나 불과 일년 반 후, 프랑수아 1세는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샤를 9세는 아직 10세에 불과했으므로, 이 때부터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으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카트린의 기본 정책은 신․구교의 화합이었다. 그녀는 전 국민이 신앙에 있어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 교리회를 설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구상은 교황의 반발에 부닥치고, 그 대신으로 1564년에 푸아시 종교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는 신․구교의 많은 거물들이 모였으나(잔 달브레, 콩데 왕자 루이 드 부르봉, 콜리니, 로렌의 추기경 샤를 드 기즈, 프랑수아 드 기즈) 교황으로부터 회의를 중단시키라는 비밀 지령을 받고 온 페라라의 추기경 이폴리토 데스테가 도착하자 화해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논쟁만 거듭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참고 자료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기린원
장 키르팡티에, 프랑소아 르브룅 등 공저 “프랑스 인의 역사” 소나무
http://home.bcline.com/corea1004/corea1004.htm
http://myhome.naver.com/loena/wartop.htm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