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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중국사] 중국의 천안문 사건과 그 이후의 중국

저작시기 2003.10 |등록일 2005.01.16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4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대학레포트때 작성했던 것이고 좋은 학점을 받았던 것입니다.

목차

1. 등소평에 대하여

2. 천안문사태

3. 천안문사태에 대한 대처 그에 대한 재평가

4. 결론

본문내용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등소평(鄧小平)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다. 사천성[四川省]에서 태어나서 1918년 프랑스로 유학을 간 후, 1921~1924년 파리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7년 광시[廣西]에서 공산당 지하운동에 종사하였다.1933년 반주류였던 모택동[毛澤東]을 지지하고, 장정(長征)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한편 류소기[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1973년 3월 총리 주은래[周恩來]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으나, 1976년 1월 주은래가 죽자 모택동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에 의하여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모택동이 죽고 화국봉[華國鋒]이 주은래 계열의 노간부인 엽검영[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동흥[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국봉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엽검영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등소평은 복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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