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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교안과 의화단

저작시기 2004.11 |등록일 2004.12.29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9페이지 | 가격 800원

소개글

주석을 통해 설명을 달았습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9세기 후반의 ‘교안’-반기독교운동
1. 교회세력의 확장과 ‘民敎’대립
2. 반기독교운동의 전개양상
3. 주도세력의 轉移와 지도이념의 轉變
4. ‘교안’의 처리과정

Ⅲ. 의화단운동
1. 의화단의 ‘源流’와 산동성
2. 의화단세력의 확대와 청조의 태도
3. 열강의 대응과 ‘東南互保’
4. 의화단운동의 좌절과 辛丑條約

Ⅳ. 맺음말

본문내용

반기독교운동의 전개는 주도층과 운동의 성격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60년 북경조약의 체결부터 1884년 중불전쟁, 중불전쟁부터 1894년 중일전쟁, 중일전쟁부터 1900년 의화단운동까지의 세 시기이다.
제 1시기에는 지방관 및 신사층이 운동을 주창, 지도하였고 그 주된 양상은 선교사, 교민 및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점철되었다. 초기 교안의 대표적 사례인 귀주(貴州)교안은 기독교의 내지선교가 인정되자마자 귀양(貴陽)에서 잠복 활동해 오던 카톨릭 주교 파우리(Louis Faurie)가 관아에 기독교의 보호를 강요하며 조약체결을 경축하는 시위를 벌여 귀양 관신의 반발을 자아내어 발생하였으며 그 이후 호남과 강서 지방의 교안에 영향을 끼쳤다. 양무운동에도 간여한 바 있는 당시 강서순무 심보정은 관신의 행동을 ‘충의’의 표현이라 부추겼으니 당시 지방관들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864년부터 1869년까지는 교회세력이 두드러지게 발호하면서 거의 중국 전역에서 소규모의 교안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반시독교 풍조가 고조되는 가운데 1870년 천진에서 교회의 영아 유괴에 관한 소문이 도화선이 되어 천진교안이 발발하였다. 평소에 교회에 반감을 갖고 있던 신사들은 서원을 휴업하고 교회를 공격하는 게첩을 살포하였다. 이에 격발된 군중이 교회와 프랑스 공사관을 습격하였고 대대적인 배외운동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물론 영국과 미국의 교회시설이 불탔으며 선교사, 상인, 영사관 직원 등 각국 서양인 20명이 살해 되었다. 이 교안 처리를 맡았던 증국번과 이홍장은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관련자 다수를 처형하였는데 신사 여론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하여 증국번은 고향에서 ‘삭적(削籍)’되는 망신을 당했으며 처형된 자들은 공장(公葬 )이 거행되고 비(碑)와 사(祠)가 건립되었다.
1880년대 교안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남부 연해지역은 프랑스가 세력범위로 삼으려 한 지역과 일치한다. 청 정부는 프랑스 교회에 대한 공격을 금지 하였으나 이 지역의 반기독교운동은 거세게 전개되었다.

참고 자료

<교안과 의화단>,<<강좌중국사>>,지식산업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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