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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강독] 삼국지위서동이전과 후한서 비교

저작시기 2003.06 |등록일 2004.12.1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7페이지 | 가격 1,200원

목차

◎후한서 (後漢書)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
Ⅰ.『부여 (夫餘) 전』 비교
Ⅱ. 『고구려 (高句麗) 전』 비교

◎魏書東夷傳과 後漢書 後論

본문내용

즉, 당시 부여는 이미 초기국가의 단계로 발전하여 왕을 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한서>의 기록 가운데 A.D. 49년 부여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내자 후한 光武帝(광무제)가 두터이 보답하여 이후 매년 사신을 보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도 부여가 여전히 왕을 칭하였고 더 나아가 중국과 교섭할 정도로 성장하여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A.D. 111 년에는 부여왕이 步騎(보기) 7·8천을 보내 낙랑군을 공략하여 吏民(이민)을 살상할 만큼 그 국력이 강력하였다.
<위지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는 부여의 정치형태는 그것이 초기국가의 단계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부여에는 세습적인 국왕이 존재하여 궁실을 짓고 있었으며, 국왕의 장사에는 玉匣(옥갑)을 쓰고 많을 때는 100여 명이나 殉葬(순장)할 만큼 왕권이 강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군장의 후신인 제가들의 세력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었으니, 3데기 초 簡位居(간위거)의 ⊙子(얼자) 麻余(마여)의 즉위과정에서 보듯이 왕위의 세습은 적자에 한하는 것이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제가들이 합의하여 국왕을 추대하였던 것이다. 부여의 옛풍습에 물과 가뭄이 고르지 못하여 5곡이 잘 영글지 않으면 그 책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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