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한국사] 김유신 가문

저작시기 2003.09 |등록일 2004.11.19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무난한 레폿

목차

1. 김유신가문의 성립
2. 서현과 만명의 만남, 그리고 탄생

본문내용

<김유신가계>

구형-노종
- 무종
- 무력-서현-유신-삼광-윤중-?-암
-장청
-윤문
-원술
-원정
-장이
-원망
-군승
-흠순-반굴-

1. 김유신가문의 성립
김유신가문의 원래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그러나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金仇亥는 신라에 투항함으로서 上等을 받아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法興王 19년 金官國主 金仇亥가 王妃와 3아들 더불어 나라를 들어 來降하므로 왕은 이들을 禮로 대접하고 上等의 位를 주고 本國을 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三國史記』卷 4 > 」

그 후 무력이 가문을 대표하여 활약케 되었던 바 그가 김유신의 조부이며 유신계의 실질적인 시조로서 활동한 장본인이다.
법흥왕~진흥왕대는 제․려와의 전쟁이 격화된 시기여서 발돋움하는 신라로서는 가야와 같은 적대적인 배후세력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투항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정치․군사적인 도움이 되었다.
김무력으로 대표되는 구가야왕족은 당시에 신라의 귀족으로는 편입될망정 하나의 가문으로서 활동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신라왕실에 협조하는 대가로 중앙정치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신라정부에 군사적 협조가 불가피하였다.
유신계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무력은 진흥왕 14년의 신주군주(신주군주)로부터 활약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78년에 발견된 단양적성비가 진흥왕 12년의 수년 앞서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때, 그는 이미 진흥왕초에 이사부를 도와 북방경략에 참여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남겼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적성비에 나타난 10명의 고관 중에 무력은 비차부 다음으로 8번째에 기록되고 있어 진흥왕초에는 두드러진 활약을 한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참고 자료

※ 참고문헌
「金庾信가문의 成立과 活動」, 신형식
화랑동와 화랑열전, 장동익외 3명, 학문사, 1985, 12~13쪽
이야기 삼국야사, 김형광, 시아출판, 2000, 85~88쪽
다운로드 맨위로